오늘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데 결정적으로 원인이된 얄타회담의 내용과 그 배경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얄타회담
얄타회담의 배경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제2차 대전까지 올라간다.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된 그 궁극적 원인은 결과적으로 얄타회담이었고, 그 회담에서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의 약속이었고, 그리고 생각보다도 소련의 전차부대가 일본의 관동군을 너무 쉽게 물리쳐 한반도의 북쪽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얄타회담
얄타회담 당시의 참여국의 정상은,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이었다. 루스벨트는 기본적으로 이번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하여, 전쟁 전의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제국주의 질서를 해체하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전쟁 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만주에서 일본의 관동군을 붕괴시키고 북한의 평양에 진주합니다.서로 상호불가침조약을 깨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소련의 참전은 지연되었고, 미국의 원폭이 투하된 뒤에 참전하였다.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습니다.루즈벨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었습니다.동유럽의 세력 재편성도 루즈벨트가 스탈린의 제안을 거의 다 수용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루즈벨트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안에 대해서는 소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습니다. 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 회담에서 독일은 동부 영토를 대거 폴란드와 소련에 넘기는 걸로 결정났습니다.
그 후의 점령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한 회담입니다. 얄타 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 회담은 비밀로 해둡시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때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소련과 미국에 의해 공산정권과 자본주의가 각각 들어서게 된다.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생각해보자.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이다.
분명히 미국의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졌고, 이는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맞이하게 해 주었다.
설혹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미국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하더라도, 1960,70년대에 탈식민지화 바람과, 80,90년대 폴란드, 홍콩 등의 독립에서 보듯이 모든 국가는 결국 식민지 사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렇게 되어 결과적으로 현재, 한반도의 북쪽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된 그 시발점이 된 것이다.이로 인해 그때까지 머뭇거리던 소련은, 일본이 원자폭탄까지 얻어맞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얄타회담의 결과 소련이 일본전에 참전하면, 러일전쟁때 빼앗긴 사할린 영토까지도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 패망직전의 일본에 선전포고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말로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게 드디어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1945년 8월 9일 미국은 나가사키에 2차 원자폭탄을 투하하게 된다.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동남아시아에서, 일본 병력의 몇배나 되는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그 군사적 손실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얄타회담
얄타회담이 일어난 때 즈음에 가장 큰 문제는 독일과 일본을 조금이라도 빨리 항복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독일은 이미 소련과의 전투에서 그 힘을 상실하여 이미 패망을 앞두고 있었지만, 일본은 달랐다.대한민국은 그들에게 중요치 않은 사항이었다. 하지만 이 얄타회담이 결과적으로 우리 대한민국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그것은 이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 일본전의 참전의 결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요 논의 사항으로는 패배한 이탈리아를 외에, 나머지 추축국 독일에 대한 처리와, 일본에 대한 전투를 위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었다.이후 1943년 9월 8일 추축국 중 이탈리아가 항복을 하게 되고, 1945년 4월30일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로, 1945년 5월 8일 드디어 독일군이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자,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미국의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투하로, 결국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있게 된다.2차 세계대전이 점차 막바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무렵, 세계열강들은 종전 후 패전국과 그 식민지의 처리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제연합을 창설한다는 전제 하에 이미 헌장의 초안이 마련되어 있는 상태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에 관한 절충안을 마련하였다.한편, 스탈린은 중국과 동맹 및 우호 조약을 체결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또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자유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임시정부를 구성하여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서방 연합국과 소련 어느 쪽도 자국이 지지하는 단체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고 결국 폴란드의 신정부는 두 단체가 협의하여 수립하기로 합의하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루블린 소재 폴란드 인민해방위원회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폴란드 처리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게된다.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위임하기로 하였다.또한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또는 몰수한다고 선언했으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 최고인민위원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공산주의를 포용하는 태도를 가졌던 미국의 루스벨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합병하는 계획도 인정해 주었다.폴란드 독립 문제에 있어서 루스벨트는 영국이 지지하는 런던 임시 정부 대신, 소련이 지지하는 루블린 임시 정부를 승인하였다. 회의는 스탈린에게 많이 양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 때문에 루스벨트는 유럽에서 소련의 특수한 이해 관계를 인정해 주려고 하였다. 그리고 전후의 평화 유지에도 소련의 협조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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