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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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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전후 상황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8. 결국 1948년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선거인 5.10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임시정부 수립과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 요구등을 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하였지만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남과 북에 두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김구선생님이 암살되어버리고 만다. 통일정부 수립이 이때 좌절되어버렸다.

신탁통치 반대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과 이를 돕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최고 5년 신탁 통치 실시가 결정 됩니다.신탁 통치안을 두고 사회주의 세력인 좌익과 민족주의 세력인 우익의 입장 차이가 드러납니다.처음에는 좌익과 우익 모두 신탁 통치안에 반대하는데 좌익 세력은 임시정부 수립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회의 결정 사안 지지 입장으로 바꿉니다.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눈치를 보던 세력이 있었는데요,바로 친일 반민족 세력입니다.



광복과 함께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어짜피 일본이 전쟁에서 져서 독립을 하게된 건데 뭣하러 독립운동하냐는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역사적 사실. 카이로회담은 광복이 된 1945년 보다 2년 전인 1943년에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가 모여 했던 회담이다.

4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되자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발언을 발표하였다. 임시 민주 정부 수립도 포함된 결정 사항이 왜때문인지 신문기사에 나오지 않아 신탁 통치라는 말에 한국의 온전한 독립이 아니라는 오해를 사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서부터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좌파는 임시민주정부수립에 방점을 찍고 지지하고, 우파는 신탁통치에 방점을 찍고 독립정부 수립이 안될까 극심하게 반대를 하였다.이런 좌/우 갈등이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고 계속 돌연변이가 생기고 거기에 극우, 극좌라는 틀린 꼬리표가 달리게 되는 것이였던 것이다. 생각은 다르지만 각자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의견이 갈라졌던 좌파 우파가 이제는 나라 망하려고 때나 쓰는 극우파와 극좌파로 물들어 버렸다. 도라이들아 제발 그만해!3.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국의 임시 민주 정부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실시 등이 결의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나라의 대부분이 일본의 식민지였지만, 우리나라 말고는 그 어떤나라도 독립을 약속받지 못했다. 나라 안팎으로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분들의 활동 덕분에 무시할 수도 있는 가난하고 작은 나라였던 우리나라의 존재감이 알려졌다는 반증이다.1.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약속하였다.

신탁통치 논란 당시 미국의 조치들은 요즈음의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과 비슷한데 아이젠하워‧닉슨‧부시‧트럼프 행정부까지 미국의 공화당이 집권 때마다 미국부담의 최소화를 시도하는 경향이 짙다. 당시 조선공화당 책임 비서 박헌영의 기자회견, 일부 언론에서 “박헌영 소련 일국 신탁통치와 소련연방 가입 희망”이라는 왜곡 보도를 낸 것으로 실제 인터뷰 내용과는 다른 보도로 소문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 아니냐고 순식간에 퍼진다.○ 해방 원년의 한국, 대규모 시위로 저물다.

훗날 국립경찰의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미국인들과의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술에 취해 말하기를, 송진우가 우파 내에서의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꺼려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그를 죽였다는 사실을 자기는 알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고 합니다.이로 인해 송진우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고 생각한 한현우와 유근배 두 사람에 의해 피격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하지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습니다. 또 장택상도 송진우의 암살범으로 지목하였고, 조병옥도 김구를 송진우의 암살 배우로 지목했습니다.송진우 피살 사건은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한국민주당 당수 송진우가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자객들의 피습을 받고 사망한 사건으로 당시 송진우는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와 견해 차이가 나타나며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는 1919년 전민족적인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습니다.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브나로드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동아일보의 창업자는 김성수이지만 동아일보의 사상적 바탕을 이루는 사람은 바로 송진우라고 합니다.고하 송진우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인데요, 그는 1916년 귀국하여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였습니다. 중앙고등보통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으며,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하여 이후 30여 년 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자로 이끌었습니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가 백의사 대원 한현우 등에게 암살된 것을 시작으로 김규식, 안재홍, 장택상, 박헌영, 김원봉 등은 수시로 테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당시 반탁 운동은 임시정부 진영이 중심이 되어 격렬하게 펼쳐졌는데요, 김구의 임정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처음부터 과열된 반대운동은 신탁통치를 매국으로 간주하여 송진우의 암살을 비롯해 기타 광범위한 우익 테러의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반탁'은 즉시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니 애국이고 즉시 독립을주장하는 미국을 지지하며 '반탁'투쟁에 나선 우익은 애국자라는 논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새로운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데 식민지배에 앞장서거나 협력했던 친일파 세력이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친일세력은 반탁투쟁에 적극 가담하여 정치적으로 국면을 전환시키려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서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기사에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라고 사실 관계를 정반대로 보도하면서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인 조선 임시정부 구성은 언급하지 않은 채 신탁통치 문제만 부각시켰습니다.

의도적인 오보 이후 국내 정국의 주요 의제는 '찬,반탁'문제로 뒤덮였습니다.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안 때문에 일어난 국민운동인데요, 한국을 분노에 빠뜨린 이 충격적인 소식에 1945년 12월 31일. 약 30만 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서울 시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신탁 통치 반대를 외쳤습니다.

이 사건이 제주 4•3사건인데 신고 접수된 희생자 수만해도 14,033명에 이릅니다.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로 불거진 좌우의 분열은 우리에게 두 가지 참혹한 결과를 안겨주었습니다.첫째로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시되면서 이념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그런 생각과 감정이 쌓여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습니다.둘째로 정의를 제때에 바로 세우지 못한것인데,

광복 이후 민족 반역자들을 단죄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했었는데 그들은 슬그머니 반공을 외치며 순식간에 애국 투사로 둔갑한 것입니다.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게 됩니다.아래 영상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며 이를 규탄하는 제주도민들의 시위가 일어납니다.시위를 진입하면서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4월 3일에는 좌익 세력 주도로 무장 봉기가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이 희생됩니다.

신탁통치 반대


유엔은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하기로 하고 이를 관리, 감독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지만 소련은 인구가 적은 북한에 불리하다고 거절합니다.결국 유엔은 남한에서만 총선걸르 실시하도록 결정하는데 이는 곧 남북 분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38도선을 베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회의를 추진하고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미국과 소련 양군 철수 요구 결의문을 채택합니다.

하지만 통일 정부 수립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김구는 암살되며 남한의 단독 선거가 결정됩니다.이에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반대 투쟁이 일어나는데, 1947년 제주도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참가자와 경찰 간의 충돌이 일어납니다.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이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 문제가 다루어집니다.

슬며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가담하며 우익 진영에 줄을 섭니다.그리고 열렬한 반공투사로 둔갑하고 좌익세력을 잡아들이는 애국 투사로 둔갑합니다.심판을 받아야 할 친일 반민족 세력이 이렇게 부활하게 됩니다.독일이 항복하자 1945년 7월에 연합국들은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합니다.

여기서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고 일본에 항복을 요구하지만 일본은 전쟁을 멈추지 않습니다.이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고 결국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 때문에 광복 직후 한국은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지만 임시 정부 요인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김구는 백범일지에 그 당시 감정을 이렇게 적어두었습니다.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이었다.

수년 동안 힘써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1939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영국, 미국, 소련,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 사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데 연합국의 승리로 전세가 기울자 미•영•중 3국 대표는 1943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일본에 대한 군사 행동과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합니다.


이 회담에서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받습니다.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관한 비밀 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군이 1945년 8월 11일 한반도에 진주하게 됩니다.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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